“구급차를 탈 만큼 어지러웠는데, 검사는 정상이랍니다”
갑자기 세상이 빙빙 돌기 시작해 구토가 멎지 않았습니다. 도저히 견딜 수 없어 구급차를 타고 응급실에 갔는데, 몇 시간 지나니 저절로 가라앉았습니다.
CT도 정상, 청력도 정상. “큰 이상은 없습니다“라는 말을 듣고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몇 달 뒤 똑같은 일이 또 벌어집니다.
이렇게 심한 어지럼 발작이 반복되는데 뚜렷한 진단명이 붙지 않는 경우, 재발성 전정장애를 의심합니다.
이름 그대로의 병입니다
귀 가장 안쪽(내이)에는 소리를 듣는 달팽이관과, 몸의 균형을 감지하는 전정기관이 나란히 있습니다. 전정기관이 하는 일을 전정기능이라고 하고, 여기에 이상이 생긴 상태를 전정장애라고 부릅니다.
전정기관이 만든 평형 신호는 혼자 일하지 않습니다. 전정신경이 그 신호를 나르고, 뇌가 받아서 처리합니다. 이 셋 중 어디가 어긋나도 어지럼은 똑같이 “빙글빙글 돈다”로 느껴집니다.
재발성 전정장애 = 전정기능의 장애가 반복해서 나타나는 상태입니다. 병의 원인을 가리키는 이름이 아니라, 나타나는 모습을 그대로 옮긴 이름입니다.
이 점이 이 병을 이해하는 출발점입니다. 아직 원인이 한 곳으로 좁혀지지 않은 단계를 가리키는 이름이기 때문입니다.
왜 생기나요 — 속귀의 압력 문제
원인이 완전히 밝혀지지는 않았습니다. 여러 가설 중 가장 설득력 있는 것은 속귀 림프액의 순환 장애입니다.
전정기관과 달팽이관 안에는 림프액이 흐르는 관이 수로처럼 뻗어 있습니다. 순환이 원활하면 관 안의 압력이 낮게 유지되지만, 순환이 막히면 관이 붓고 압력이 올라갑니다. 이 상태를 내림프 수종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관이 부어 있는 것만으로는 그렇게까지 심한 어지럼이 생기지 않습니다. 발작이 터지는 순간에는 다른 일이 벌어집니다.
어지럼 발작이 생기는 과정 — 가장 유력한 설명
- 림프액 순환이 막혀 관이 붓고 압력이 올라갑니다
- 압력이 계속 오르다 관에 미세한 파열이 생깁니다
- 새어 나온 림프액이 주변 전정신경의 잔가지를 적십니다
- 평형 신호가 급격히 흐트러지며 심한 어지럼 발작이 터집니다
- 액체가 빠지며 압력이 다시 낮아지고, 수 시간 안에 저절로 가라앉습니다
발작이 저절로 좋아지는 이유가 여기서 설명됩니다. 응급실에 도착할 무렵 이미 나아지고 있어 “검사는 정상”이라는 말을 듣게 되는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중간에 놓인 병입니다
이 페이지에서 가장 말씀드리고 싶은 부분입니다.
재발성 전정장애는 독립된 하나의 병이라기보다, 아직 어느 쪽으로도 기울지 않은 중간 상태에 가깝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다음 중 어느 모습으로든 드러날 수 있습니다.
- 메니에르병의 앞 단계 — 지금은 어지럼만 있지만, 나중에 청력 저하·이명·귀 먹먹함이 따라붙으면 메니에르병으로 진단됩니다. 그래서 재발성 전정장애를 ’전정형 메니에르병’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 전정편두통 — 편두통 병력이 있다면 뇌가 과민해져 생긴 어지럼일 수 있습니다. 두통 없이 어지럼만 오는 경우가 절반이라 놓치기 쉽습니다
- 가벼운 PPPD — 발작 사이에도 잔잔한 어지럼이 남아 있다면 이쪽 성격이 섞인 것입니다
세 질환은 칼로 자르듯 나뉘지 않고 하나의 스펙트럼 위에 있다는 것이 최근의 시각입니다. 실제 진료에서도 처음부터 딱 떨어지게 구분되는 경우는 많지 않습니다.
그래서 귀만 보거나 뇌만 봐서는 방향이 잡히지 않습니다. 두 축을 함께 확인해야 합니다.
어떤 증상인가요
재발성 전정장애에서 흔히 듣는 이야기
- 전조 없이 갑자기 시작됩니다
- 세상이 빙빙 도는 회전성 어지럼에 심한 구역·구토가 함께 옵니다
- 수 시간에서 길어야 하루 안에 저절로 가라앉습니다
- 발작이 지나면 대체로 멀쩡합니다
- 몇 달에서 몇 년 간격으로 또 옵니다
발작을 부르는 상황은 대체로 정해져 있습니다. 과로, 심한 스트레스, 잠 부족, 술·담배, 카페인 과다, 짜게 먹는 것입니다. 발작 전 며칠을 돌아보시면 대개 짚이는 것이 있습니다.
발작을 거듭할수록 간격이 짧아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첫 발작 뒤 1년 안에 재발하는 경우는 드물지만, 반복될수록 주기가 당겨지고 발작 사이에도 잔잔한 어지럼이 남기 시작합니다. 이때가 앞서 말씀드린 스펙트럼의 ’뇌 쪽’으로 기울어 가는 신호입니다.
이명, 귀 먹먹함, 귀 통증이 함께 오는 경우도 흔합니다.
이석증으로 오해받기 쉽습니다
놓치기 쉬운 부분이라 따로 말씀드립니다. 재발성 전정장애의 발작이 이석증과 비슷한 모습으로 오는 경우가 있습니다.
다만 나이 들며 생기는 전형적인 이석증과 달리 안진 양상이 전형적이지 않고, 이석정복술을 해도 깔끔하게 낫지 않습니다. 이런 경우 단순 재발성 이석증으로만 보고 정복술을 반복하다 오래 헤매게 됩니다.
정복술을 여러 번 받았는데도 계속 재발한다면, 이석증이 아니라 그 뒤에 다른 병이 있는 것은 아닌지 확인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진단 — 귀와 뇌를 함께 봅니다
앞서 본 것처럼 평형 신호는 전정기관 → 전정신경 → 뇌 세 단계를 거칩니다. 어느 단계의 문제인지 가리는 것이 진단의 핵심입니다. 진료실에서는 두 가지 검사를 함께 시행합니다. 비디오안진검사로 평형기관의 상태를, 정량뇌파로 뇌가 과민해진 정도를 봅니다.
정량뇌파는 빠른 파동인 고베타로 봅니다. 붉게 보이는 범위가 넓을수록 뇌 회로가 더 과민하다는 뜻입니다.
같은 과민이라도 어떤 파동이 우세한지에 따라 유형이 갈립니다. 빠른 파동(고베타)이 주로 늘어난 하이베타 우세형이 가장 흔하고, 느린 파동(델타)이 주로 늘어난 유형도 있습니다.
두 검사 결과의 조합에 따라 이 어지럼이 스펙트럼의 어디쯤에 있는지가 드러납니다. 실제 검사 화면으로 보여 드리겠습니다.
① 둘 다 정상 — 발작 사이에 오신 경우
발작이 지나간 뒤에는 이렇게 아무것도 잡히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검사는 정상”이라는 말을 듣게 되는 상태가 이것입니다. 이상이 없다는 뜻이 아니라, 지금은 조용하다는 뜻입니다.
② 안진만 이상 — 귀 쪽에 가까운 경우
이런 경우는 스펙트럼의 귀 쪽에 가깝습니다. 속귀의 압력을 다스리는 치료가 중심이 되고, 청력 변화가 따라오는지 함께 지켜봅니다.
③ 뇌파만 이상 — 뇌 쪽에 가까운 경우
이런 경우는 뇌 쪽입니다. 평형기관은 멀쩡한데 뇌가 신호를 과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상태로, 전정편두통이나 PPPD와 같은 결의 문제입니다. 이때는 속귀 약보다 뇌의 과민함을 낮추는 치료가 맞습니다.
같은 “반복되는 어지럼 발작”인데 치료가 정반대로 갈라지는 지점입니다. 검사를 함께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필요한 경우 온도안진검사, 비디오 두부충동검사, 전정유발근전위검사를 더해 전정기능을 자세히 평가합니다. 안진 양상이 뇌 쪽을 시사하거나 팔다리 위약 같은 증상이 함께 있으면 뇌 영상검사로 확인합니다.
치료 — 발작기와 발작 사이가 다릅니다
발작이 터졌을 때
목표는 빨리 가라앉히는 것 하나입니다. 어지럼과 구토를 진정시키는 약을 쓰는데, 구토가 심할 때는 먹는 약이 넘어가지 않으므로 주사로 투여하는 편이 빠릅니다.
다만 이 약들은 길게 쓰지 않습니다. 오래 쓰면 뇌가 균형을 다시 맞춰 가는 과정을 방해해 어지럼이 되레 길어집니다.
발작과 발작 사이
이 시기의 치료가 다음 발작을 줄이는 진짜 치료입니다. 검사 결과에 따라 방향이 갈립니다.
- 귀 쪽에 가까우면 — 속귀의 림프 순환을 돕는 약과 이뇨제로 압력을 다스립니다
- 뇌 쪽에 가까우면 — 뇌의 과민함을 낮추는 편두통 예방약 계열을 씁니다
- 양쪽 성격이 섞여 있으면 — 두 가지를 함께 쓰기도 합니다
발작 사이에도 잔잔한 어지럼이 남는다면 전정재활운동을 병행합니다.
생활 관리 — 유발 요인을 줄입니다
- 술과 담배를 피합니다 — 속귀로 가는 혈관을 수축시켜 순환을 방해합니다
- 카페인을 줄입니다 — 커피·녹차·콜라·초콜릿·에너지음료
- 짜게 먹지 않습니다
- 단 음식을 줄입니다 — 림프액의 압력을 올릴 수 있습니다
- 충분히 잡니다
- 스트레스를 관리하고 가벼운 운동을 이어 갑니다
지키기 어려운 항목부터 완벽하게 하려다 포기하기보다, 가장 자주 걸리는 유발 요인 한두 가지를 먼저 줄이는 편이 오래갑니다.
치료 뒤에는 검사 소견도 달라집니다
앞에서 귀와 뇌를 두 축으로 나눠 보았습니다. 치료가 잘 되면 그 두 축이 각각 정상 쪽으로 돌아옵니다.
귀 쪽 — 안진이 사라집니다
평형기관 쪽이 회복되면 자세를 바꿔도 눈의 떨림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어지럼이 줄었다는 환자분의 말씀과 검사 수치가 함께 움직입니다.
뇌 쪽 — 과민함이 내려갑니다
뇌 쪽도 마찬가지입니다. 증상이 좋아지는 것과 뇌파가 내려가는 것이 대체로 함께 갑니다.
그래서 두 검사는 약을 줄여도 될 시점을 판단할 때 참고 자료가 됩니다. 증상만으로는 “좋아진 것인지, 잠시 조용한 것인지” 구분이 어려울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검사만 보고 치료를 정하지는 않습니다. 증상과 진찰이 먼저이고, 검사는 그 판단을 뒷받침하는 자료입니다.
예후 — 겪을 때는 무섭지만
발작 중에는 응급실에 실려 갈 만큼 힘들기 때문에 큰 병이 아닌지 걱정하시는 분이 많습니다. 다행히 경과는 대체로 양호합니다. 적절히 치료하면 발작이 자주 반복되는 경우는 드뭅니다.
다만 다음의 경우에는 꾸준한 관리가 필요합니다.
- 발작이 자주 재발하는 경우
- 발작 사이에도 어지럼이 계속 남는 경우
- 청각 증상이 따라붙어 메니에르병으로 진행하는 경우
- 양쪽 귀 모두에 전정장애가 생기는 경우
기억해 주셨으면 하는 것
재발성 전정장애는 “아직 이름이 다 정해지지 않은 어지럼“입니다. 그래서 병원마다 다른 이야기를 듣기도 하고, “검사는 정상”이라는 말에 답답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방향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귀 쪽인지 뇌 쪽인지에 따라 쓰는 약이 갈리고, 시간이 지나며 어느 쪽으로 기우는지도 드러납니다.
진료에서는 발작의 양상과 유발 상황을 확인하고, 비디오안진검사와 정량뇌파로 귀와 뇌를 함께 살펴 지금 어디쯤에 있는지 판단한 뒤 그에 맞는 치료를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